30년을 이어온 토이 스토리 시리즈, 이번 적수는 카우보이도 우주비행사도 아닌 태블릿입니다. 제시와 우디가 되찾으려는 게 정말 보니의 마음뿐이었는지, 셰리 터클의 논의로 풀어봅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영화의 주요 설정과 전개를 다룹니다.
30년 가까이 이어온 시리즈가 이번에 맞붙인 적수는 카우보이도, 외계인도, 골동품 가게 주인도 아니다. 개구리 모양의 교육용 태블릿, 릴리패드다. 토이 스토리라는 프랜차이즈가 지금까지 던져온 질문, 즉 "아이에게 잊히면 장난감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이번엔 화면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경쟁자 앞에 세워놓은 셈이다.
보니를 사이에 둔 두 세계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옆집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의기소침해진 보니를 위해 부모님이 교육용 태블릿 릴리패드를 사줍니다. 그런데 이 선물이 장난감들을 순식간에 찬밥 신세로 만들어버립니다. 보니는 태블릿 화면 속 친구들에게 마음을 쏟고, 마당에 흩어진 장난감들은 조용히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흥미로운 건 보니가 처음부터 전자기기를 선호했던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마당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보니를 옆집 아이들이 비웃고 들어가 버리는 장면이 먼저 나옵니다. 제시는 그 이유를 몰라 아이들과 보니를 계속 이어주려 애쓰다가, 그 집 아이들이 온종일 스마트폰과 태블릿에만 몰두해 있다는 걸 목격합니다. 보니가 릴리패드를 갖게 된 것도 결국 소외를 피하려는 선택이었던 셈이라, 이 위기의 출발점 자체가 또래 집단 안에서의 소속감이라는, 아이들에게는 훨씬 절박한 문제였다는 걸 짐작하게 합니다.
제시는 처음엔 보니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이건 일시적인 거라고 애써 부정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과 태블릿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떠났던 우디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기에 배송 사고로 무인도에 흩어진 버즈 라이트이어 수십 개가 자기들만의 '우주 사령부'를 상상하며 뗏목을 짓는 서브플롯까지 겹치는데, 이 코믹한 곁가지조차 결국은 같은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존재의 이유를 잃은 존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릴리패드라는 새로운 종류의 빌런
지금까지 토이 스토리의 빌런들은 대개 장난감이었습니다. 랏소, 고소공포증 앤디의 이웃 시드, 골동품 가게의 개비 개비까지, 전부 장난감의 논리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들이었죠. 이번엔 다릅니다. 릴리패드는 장난감이 아니라 전자기기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소재 변경 이상의 무게를 갖습니다. 지금까지의 빌런들은 아무리 뒤틀렸어도 결국 장난감이라는 같은 처지에서 출발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처럼 장난감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동기를 갖고 있었죠. 릴리패드에게는 그런 동기가 없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애초에 설계된 기능일 뿐, 그 기능에 어떤 결핍이나 상처가 얽혀 있지 않습니다. 감정을 가진 적과 싸우던 시리즈가, 이번엔 감정이 아예 필요 없는 상대와 마주한 셈입니다.
이 설정 변화가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습니다. 픽사 측은 이번 작품을 두고 시리즈 내내 장난감의 존재 이유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아이들의 마음을 통째로 빼앗아가는 존재, 즉 전자기기가 나타나면서 장난감들의 역할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장난감 대 장난감의 싸움이 아니라, 물리적 존재 대 화면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구도로 판이 바뀐 겁니다.

셰리 터클이 말한 '함께 있지만 홀로'
미국의 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사람들을 더 많이 연결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외롭게 만든다는 걸 오랫동안 연구해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 현상을 '함께 있지만 홀로'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화면 너머의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존재와의 깊은 관계를 대체해버린다는 것이죠.
터클이 특히 주목했던 지점은, 이 대체가 결핍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면 속 연결을 통해 오히려 더 충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기술은 우리에게 관계처럼 보이는 착각을 제공하면서 진짜 관계가 요구하는 수고로움은 면제해줍니다. 문자를 보내는 건 전화를 거는 것보다 쉽고, 전화를 거는 건 얼굴을 마주 보는 것보다 쉽습니다. 그 쉬움이 쌓일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운 쪽, 즉 진짜 깊은 관계를 감당할 힘을 잃어간다는 게 터클의 경고였습니다.
보니의 상황이 정확히 이 논의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릴리패드를 통해 또래 친구들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마당에서 늘 함께 있어주던 장난감들, 즉 실제로 보니를 가장 잘 아는 존재들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터클의 논의를 빌리면 이건 단순한 취향 변화가 아니라, 연결의 형식이 바뀌면서 관계의 깊이 자체가 얕아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장난감들이 위협을 느끼는 건 단지 밀려나서가 아니라, 그 자리를 채우는 게 진짜 연결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평가가 갈리는 지점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보스턴 글로브는 이번 작품이 이야기를 제시의 여정으로 만들면서 시리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평했습니다. 반면 같은 리뷰는 기술이 인간을 하루 종일 화면만 들여다보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초반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영화가 끝까지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겼습니다. 비판의 칼날을 들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거둬들인 셈이라는 지적입니다.
이 지적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가족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가 짊어진 딜레마이기도 하니까요. 기술 비판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정작 그 기술을 사용하는 관객, 즉 태블릿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볼 수도 있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불편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비판을 무디게 하면 처음 던졌던 질문의 날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 영화가 그 중간 어디쯤에서 타협했다는 인상을 준다면, 그건 연출의 실패라기보다 이 소재가 가족 영화라는 형식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가디언의 평가는 더 냉정합니다. 5점 만점에 2점을 주면서, 프랜차이즈에 새 배터리가 필요하다고, IP 소진이 시작됐다고 꼬집었습니다. 반면 IGN은 우디가 이야기에 꼭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음에도 결과적으로 모험적이고 여운이 남는 결말을 이끌어냈다고 평했습니다. 기술 비판의 날카로움과 시리즈 특유의 감정적 완성도 사이에서, 평가가 정확히 갈리는 모양새입니다.
앤디의 시대에서 보니의 시대로
감독 앤드루 스탠턴은 한 시사회에서 토이 스토리 3이 '앤디의 시대'의 끝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보니와 함께하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건, 장난감이라는 존재 자체가 결국 한 아이의 성장과 함께 소모되고 대체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시리즈가 계속 인정해왔기 때문입니다. 3편에서 앤디가 우디를 보니에게 넘겨주던 장면이 이별과 계승을 동시에 그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리즈는 상실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룹니다.
다만 이번엔 그 대체재가 더 성장한 다음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나이와 무관하게 언제든 끼어들 수 있는 화면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앤디는 자라서 우디를 떠났지만, 보니는 자라지 않아도 언제든 릴리패드 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 있습니다. 세대 교체가 아니라 매체 교체라는 점에서, 이번 위기는 시리즈가 이전에 다뤘던 그 어떤 상실보다 훨씬 항시적이고 반복 가능한 위협에 가깝습니다.
토이 스토리가 30년 가까이 붙잡아온 질문, 즉 사랑받지 못하게 된 존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번엔 관객 각자의 호주머니 속 기기를 가리키며 되돌아옵니다. 그 질문을 얼마나 끝까지 밀어붙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갈리지만, 질문 자체를 다시 던졌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