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75만 달러로 전 세계 5억 달러를 벌어들인 공포영화 옵세션. 소원을 들어주는 원 위시 윌로우와, 착한 남자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던 진짜 공포를 결말과 함께 풀어봅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영화의 결말과 반전을 전부 다룹니다.

제작비 75만 달러. 흥행 수익 5억 달러 이상. 숫자만 봐도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이 공포영화는, 신예 감독 커리 바커의 장편 데뷔작이다. 한국에는 9월 2일 상륙했고, 씨네21 평론가 평점 7.33에 관객 평점 8.71이라는 이례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숫자보다 더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정말로 공포로 삼은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소원 하나, 그리고 대가
음반 매장에서 일하는 소심한 청년 베어는 오랫동안 니키를 짝사랑해왔습니다. 고백할 용기를 못 낸 채 시간만 흘려보내던 어느 밤, 베어는 골동품 상점에서 산 '원 위시 윌로우'를 부러뜨리며 소원을 빕니다. "니키가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원래 그가 그 가게에 들른 이유는 니키가 하수구에 떨어뜨린 목걸이를 대신 사주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시작은 순수한 호의였는데, 그 호의가 좌절되는 순간 곧바로 초자연적인 지름길로 방향을 트는 거죠.
그날 밤 니키가 갑자기 베어를 찾아옵니다.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거짓말을 지어내면서요.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니키의 행동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죽은 고양이 샌디의 사체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베어가 출근하지 못하게 현관문을 테이프로 봉해버립니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가까운 무언가로 변질되어 가는 겁니다.
진짜 반전은 베어에게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화의 진짜 반전이 등장합니다. 베어는 니키의 이상 행동을 보고 소원의 부작용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요청하는 건 소원을 완전히 취소해 달라는 게 아니라, "니키가 나를 친구로서만 사랑하게 해달라"는 수정입니다. 니키의 사랑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던 겁니다.
이 장면 하나가 이 영화 전체의 성격을 결정짓습니다. 진짜 괴물 같은 캐릭터라면 애초에 소원을 취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반대로 진짜 피해자라면 무조건 원상복구를 요청했을 겁니다. 베어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습니다. 문제를 알아차렸지만, 그 문제 안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은 남겨두려는 계산. 이게 훨씬 현실적이고, 그래서 훨씬 불편합니다.
절정에서 니키는 자신도 또 다른 원 위시 윌로우로 "베어도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겁니다. 대칭적인 저주가 완성되는 순간이죠. 베어는 약물 중독으로 몸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니키에게 달려가 사랑을 고백하고, 결국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둡니다. 베어가 죽자 저주가 풀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진짜 니키가 남습니다.
표면적으로 베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한 저주의 피해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면, 그는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자 작품이 진짜로 하려는 말 그 자체입니다. 니키가 소원 이후 이상하게 변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변화를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계속 포장하며 현실을 부정합니다.
칸트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철학자 칸트는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하나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인격체는 언제나 목적으로 대해야 하며, 결코 순전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자유로운 선택과 동의를 무시하고 내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삼는 순간, 그 관계는 윤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원칙은 흔히 거창한 사회 정의나 정치적 맥락에서 인용되지만, 사실 가장 사적인 관계, 즉 연애나 사랑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될 때 이 원칙은 더 쉽게 무시됩니다. "널 너무 사랑해서 그런다"는 말이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쓰이는 경우를, 우리는 영화 밖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합니다.
베어가 빈 소원은 이 원칙을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위반합니다. 그는 니키에게 사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니키의 의지와 판단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그녀를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개조해버렸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 인간의 자율성을 완전히 박탈한 소유 행위에 가깝습니다. 동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배라는 것을, 이 영화는 초자연적 설정을 빌려 아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베어가 이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니키의 행동이 소원 때문에 뒤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그는 상대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끝내 수단으로 대하는 쪽을 선택한 셈입니다. 무지가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게, 이 캐릭터를 훨씬 섬뜩하게 만듭니다.

착한 남자라는 가면
베어라는 캐릭터가 유독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폭력적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짝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수줍은 '나이스 가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착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겨냥하는 지점입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소극적인 태도 뒤에, 결국 상대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소유욕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죠.
'나이스 가이'라는 표현 자체가 최근 몇 년 사이 온라인에서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됐던 캐릭터 유형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려가 실은 "이만큼 잘해줬으니 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무언의 거래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베어는 이 유형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니키에게 억지로 뭔가를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우주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버렸을 뿐이죠.
거절당할 용기가 없어서 소원이라는 지름길을 택했다는 설정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은 심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결과처럼 보입니다. 상대의 '아니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대답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괴물이나 초자연적 존재 때문이 아니라, 이 마음이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을 법한 감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원숭이의 손, 그 오래된 경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저주받은 물건이 비극을 부른다는 이야기 구조는 고전 괴담 '원숭이 손'에서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장치입니다. 이 영화가 그 구조를 빌려오면서 바꾼 건 단 하나입니다. 소원이 잘못 이뤄져서 벌어지는 비극이 아니라, 소원이 정확히 원하는 대로 이뤄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라는 것. 원숭이 손 이야기에서는 소원을 빈 사람이 의도치 않은 부작용에 고통받지만, 이 영화는 그 익숙한 공식을 뒤집습니다. 베어의 소원은 왜곡되지 않았습니다. 니키는 정말로 그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게 됐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애초에 가능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있었을 뿐입니다.
75만 달러짜리 저예산 영화가 5억 달러의 흥행을 만들어낸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화려한 특수효과나 초자연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쉽게 소유욕을 정당화하는지를 정면으로 찌른 것. 이 영화가 남긴 진짜 공포는 아마 그 지점일 겁니다. 극장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라면 그 소원 앞에서 정말 취소를 택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