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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해석: 이창동이 8년 만에 던진 질문

by 필름휴머니스트 2026. 9. 23.

버닝 이후 8년, 이창동 감독이 넷플릭스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 주연의 가능한 사랑,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언론 시사회 보도를 바탕으로 영화의 주요 장면과 전개를 다룹니다.

가능한 사랑 공식 포스터
가능한 사랑 공식 포스터

2018년 〈버닝〉 이후 8년입니다. 그사이 많은 감독들이 신작을 냈고, 많은 배우들이 세대교체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창동이라는 이름 하나로 전도연과 설경구는 시나리오도 보기 전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제작보고회에서 전도연은 "감독님이 제안하셔서 하겠다고 했고, 저는 시나리오부터 빨리 달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시나리오도 안 보고 출연을 결정하는 배우, 그것도 칸의 여왕이라 불리는 배우가 그런다는 건, 이 감독의 이름값이 여전히 어떤 무게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정도 무게를 가진 복귀작이 오늘, 넷플릭스가 아니라 극장에서 먼저 걸립니다.

두 부부, 하나의 카메라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과 그의 아내 미옥(전도연).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그녀의 남편 상우(조인성). 이야기는 예지가 호석을 다큐멘터리 피사체로 삼으면서 시작됩니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만난 두 부부는 서로의 삶에 점점 깊이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각자 숨겨왔던 욕망과 계급의 간극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인물 구도만 놓고 보면 단순해 보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부부와 부유한 부부, 찍히는 쪽과 찍는 쪽. 그런데 이 구도가 흥미로운 건, 어느 한쪽도 완전한 가해자나 피해자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지는 선의로 시작했을 카메라를 든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기 작품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호석과 미옥은 그 시선을 받아들이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관계를 이용하거나 저항합니다. 네 사람 모두가 조금씩 계산하고, 조금씩 진심입니다. 상우 역시 겉으로는 아내의 작업을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그 관계에 자신만의 다른 욕망을 겹쳐놓는 인물로 그려지는 듯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미 이 구도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미옥이 울고, 호석이 아내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울고 싶으면 그냥 울라"고 말하는 장면을, 어린 아들이 마치 관찰자처럼 지켜봅니다. 위로하는 사람과 위로받는 사람,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이 삼각 구도가 영화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셈입니다. 나중에 예지의 카메라가 이 가족을 향할 때, 관객은 이미 한 번 아들의 자리에서 이 부부를 지켜본 경험이 있는 셈이라, 그 시선의 무게를 어느 정도 나눠 짊어지게 됩니다.

미옥이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유독 밝게 빛납니다. 해고와 가난, 남편의 상처에 짓눌린 삶 속에서도 그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삶의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말한 "거대한 힘에 삶을 규정당하지 않고 끝내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을, 이 인물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는 드뭅니다. 후반부, 상우 집안의 별장 앞바다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는 미옥의 모습은 세상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 그 자체로 읽힙니다. 언론 시사회에서 이 장면을 두고 나온 평 중에는 "결국 달빛처럼 은은한 사랑 이야기"라는 표현도 있었는데, 격렬한 파국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밀려오는 방식으로 감정을 쌓아가는 게 이 영화의 결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가능한 사랑 - 포스터
가능한 사랑 - 포스터

카메라를 든다는 것의 윤리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예지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호석과 미옥의 삶을 기록하려 하는데, 그 시선이 순수한 연민에서 출발했는지, 아니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창작 욕망이 앞선 것인지 영화는 계속 의심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 사람을 사랑하려 했지만, 정작 그 사랑의 진정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구조인 셈이죠.

미국의 평론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 오랫동안 질문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고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는 순간, 그 고통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이나 연민의 재료가 되어버리고, 정작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그 프레임 안에서 대상으로 축소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예지가 호석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려 할 때마다 영화가 느끼게 하는 그 불편함은, 손택이 진작에 짚어낸 이 딜레마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손택의 논지를 조금 더 밀어보면, 문제는 카메라를 든 사람의 선의 여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렌즈라는 매개 자체가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버립니다. 그 거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즉 예지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라 호석과 미옥의 삶 안으로 실제로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자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아마 그 붕괴의 순간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데 있을 겁니다.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이 카메라를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상대와 같은 높이에 설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조건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계급의 문제도 같은 축에서 작동합니다. 두 부부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은 서로의 격차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자체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의 삶을 기록하고 편집하고 세상에 내보이는 권력 구조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이걸 감추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이런 종류의 계급 서사는 자칫 도식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가난한 쪽은 순수하고 부유한 쪽은 위선적이라는 익숙한 이분법 말이죠. 그런데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을 돌아보면, 그는 늘 이런 쉬운 도식을 피해왔습니다. 〈시〉에서도, 〈오아시스〉에서도 사회적 약자는 그저 연민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욕망하고 실수하고 선택하는 온전한 인간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번에도 미옥과 호석이 단순한 피해자로 소비되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이런 전작들의 궤적에서 나옵니다. 반대로 예지와 상우 쪽도 단순한 위선자로 그려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부유한 쪽 역시 늘 자기만의 결핍과 공허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었으니까요.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말은 냉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타인의 고통마저 쉽게 소비하는 시대에, 누군가의 상처를 온전히 바라보고 끌어안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 이게 이 영화가 결국 도달하려는 지점입니다.

제목이 '가능한 사랑'인 이유도 여기 있을 겁니다. 완성된 사랑, 확신에 찬 사랑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계급이 다르고, 욕망이 다르고, 카메라를 든 자와 찍히는 자로 나뉜 관계 속에서도 사랑이 여전히 가능한가를 묻는 제목인 셈이죠. 이창동 감독 스스로도 이 영화를 두고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영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질문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그 질문의 답을 관객에게 완전히 떠넘기지 않고, 미옥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심스럽게 방향만 제시하는 쪽을 택한 셈입니다.

베니스가 먼저 알아본 작품

이 영화는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은사자상(감독상)을 받았습니다. 24년 전 〈오아시스〉로 같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이창동 감독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수상이었을 겁니다.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뉴욕영화제에도 초청되며 공개 전부터 주목받았고, 실제로 언론 시사회 반응도 뜨거운 편입니다.

수상 소감에서 감독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얼마나 솔직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을 아꼈다고 합니다. 화려한 수사 대신 조심스러운 태도를 택하는 모습이,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태도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을 확신에 차서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정직하게 던져놓고 관객과 함께 그 앞에 서 있으려는 감독의 태도 말이죠. 8년이라는 공백 뒤에 내놓은 영화치고는,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여전히 같은 질문을 붙잡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164분이라는 러닝타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닙니다. 극장에서 먼저 공개된 뒤 11월 6일부터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되는데, 이 정도 무게의 작품을 스트리밍 이전에 극장에서 먼저 만날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올가을 극장가에서 놓치기 아까운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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